송삼석 (주)모나미 회장 "흔히 기업인은 돈을 앞세우지만, 사람이 우선이죠"
▲ 송삼석 회장과 본보 조상진 선임기자가 모나미 볼펜을 생산하게 된 동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안봉주기자 bjahn@
'모나미 153' 볼펜은 한국 문구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50년 동안 35억 자루가 넘게 팔렸다. 한 줄로 늘어 놓으면 지구 12바퀴를 돌고도 남는다. 지금도 하루 15만 개가 팔려나간다니 그야말로 '국민볼펜'인 셈이다.또 어린 시절 왕자표 파스와 모나미 그림물감을 사용하지 않고 자란 한국인은 드물 것이다. 상표 이름인 사인펜 매직펜 플러스펜 역시 보통명사가 되었다. 그 만큼 모나미는 우리 생활 깊숙히 잡고 있다. 이 땅에 이 같은 문구류의 싹을 띄우고 기른 분이 (주)모나미 송삼석(宋三錫·84) 회장이다. 경제개발의 삽질이 막 시작되던 1960년대 초 문구 제조업 외길에 매진, 불굴의 의지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것이다. 지금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성공적인 노후를 보내고 있는 송 회장을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대신빌딩 5층 (주)항소에서 만났다.
-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근황을 들려주시죠.
"매일같이 아침이면 아내와 함께 이화여대 뒷산(안산)을 다녀 옵니다. 도중에 봉은사를 지나는데 요새는 중간에 좀 쳐져요. 그리고 1주일에 한 두번씩은 친구들(고재청 전 국회부의장 등)을 만나 점심식사를 합니다. 경기도 수지에 있는 모나미와 이곳 항소에는 한 달에 한 두번 정도 들립니다."
- 교회에는 주일마다 나가십니까?
"70대 초반만 해도 (부부끼리) 교회에 나갔는데 80대 넘어서 부터는 큰 아들이 자동차를 몰고와서 데려갑니다. 인생이 노년기에 행복해야 참다운 인생의 맛인데 아직은 행복합니다.(웃음)" (송 회장은 정동제일감리교회 장로, 부인은 집사로 독실한 크리스찬이다. 또한 송 회장 자녀들은 일요일 저녁이면 북아현동 송 회장 집에 모여 화목하게 저녁식사를 같이한다.)
- 고향 전주(삼례)에는 가끔 들르시는지요?
"지금은 못내려 갑니다. 전주에 있는 (북중)동창들이 거의 다 죽었어요. 예전엔 총동창회가 열릴 때면 꼭 내려갔는데…"
- 모나미(Monami Corporation)는 당초 문구 제조업체에서 글로벌 사무용품 유통서비스 기업으로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창업자 입장에서 지금의 사업 다각화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업 다각화는 좋습니다만, 문구산업에 기초한 기업을 육성해 달라, 이렇게 당부합니다. 작년에 모나미가 3450억 원의 매출을 올렸습니다. 2015년까지 1조 원을 올린다는데 잘 되리라 믿습니다."
- 모나미 하면 아무래도 국민볼펜으로 사랑받고 있는 '모나미 153'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처음 볼펜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습니까?
"1962년 5월께 5·16 군사쿠데타 1주년을 기념해서 경복궁에서 국제박람회가 열렸습니다. 저희 광신화학은 그 때 일본에서 문구류를 수입해 팔면서 모나미 물감과 왕자파스를 자체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박람회에는 우리의 문구류 수입원인 우치다요코(內田洋行)측과 공동 참가했는데 그 회사에서 파견나온 직원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쓰는 겁니다. 그게 볼펜이었어요. 당시 우리는 펜에 잉크를 찍어 쓰거나 만년필을 사용했습니다. 신기했지요. 바로 '저걸 우리가 생산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그렇게 시작했죠."
- 일본 업체에서 볼펜 만드는 기술을 쉽게 이전해 주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볼펜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이 서자 마음이 바빠졌습니다. 일단 일본인 직원을 설득했습니다. 그가 본사로 부터 '계산기 10대를 팔고 오라'는 밀명을 받고 온 것을 알고 도와줬습니다(당시 1인당 GNP가 87달러였는데 계산기는 2000달러였다). 고맙게 생각한 그 직원이 본사에 보고를 했고, 사장이 일본 볼펜시장의 90%를 차지하고 있던 오토볼펜을 소개해줬습니다. 바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어렵게 설득한 끝에 우선 유성(油性)잉크 제조기술만 가르쳐주기로 약속을 받았습니다."
- 처음 볼펜을 만들어 판매했을 때 국민들은 생소하게 느꼈을 텐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면 말씀해 주시죠.
"처음에는 볼펜 판매가 부진했습니다. 국민들의 몸에 밴 펜글씨 탓에…. 그래서 직원들을 동원해 책상에서 잉크없애기 운동을 벌이고 사무실을 돌며 볼펜 나눠주기 판촉을 벌였습니다. 웃지못할 에피소드도 많았습니다. 볼펜은 잉크의 성분 배합이 조금만 잘못돼도 플라스틱 관 밖으로 역출해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간혹 성분배합이 잘못돼 직장인이나 대학생들이 와이셔츠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잉크가 새는 바람에 흰 와이셔츠를 못입게 되는 경우가 왕왕 발생했습니다. 우리는 고객들에게 무조건 변상해줬습니다."
- 국민볼펜인 '모나미 153'이란 이름은 어떻게 생겨난 것입니까?
"국내에서 처음으로 만든 볼펜에 근사한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습니다. 전 직원을 대상으로 아이디어를 공모했는데 이구동성으로 '모나미 볼펜'(모나미는 프랑스어 Mon Ami로 나의 친구라는 뜻)을 추천했습니다. 이미 '모나미 물감'이 큰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 특별한 의미를 담고 싶었는데 한 직원이 '모나미 153이 어떻습니까?'라고 툭 뱉는겁니다. 화투놀이에서 1, 5, 3을 더하면 가보로 가장 높고, 발음하기도 좋다고 하면서요. 순간 성경책 요한복음이 떠올랐습니다. 21장 11절에 베드로가 예수님이 지시한 곳에서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귀절이 나옵니다. 여기서 153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 많은 성과를 올릴 수 있다는 상징적 숫자입니다. 저는 그런 정신으로 기업을 경영했습니다."
- 현재 모나미 153 볼펜 값이 300원인데, 그 동안 볼펜 가격에 얽힌 사연이 꽤 있을듯 합니다만.
"당시 서울 시내버스 요금이 15원, 신문 한 부값이 15원이었는데 거기에 맞췄습니다. 이후 30년 가까이 정부에서 볼펜을 독과점 품목으로 분류해 가격을 올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소비자 물가에 영향을 미친다고 해서…."
- 당시 볼펜 판촉을 위해 많은 광고를 했고, 덕분에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과 골프 칠 기회를 가지셨다면서요?
"1968년에 이병철 회장이 광고주인 기업체 대표 30명을 안양 CC로 초청했습니다. 저는 1시간 먼저 가서 이 회장과 같은 조(組)에서 친 겁니다. 9홀을 마치고 클럽하우스에서 냉면을 먹을 때 마침 제일제당의 미풍이 눈에 띄길래 일본의 아지노모토(味元) 얘길 꺼냈습니다. 여름 장마에 구멍을 2배로 키워 재고처리를 했다는 일화입니다, 그 말을 듣던 이 회장은 '기업인은 절대 그런 식으로 소비자를 우롱해서는 안된다'면서 정도(正道)경영을 강조했는데 인상적이었습니다."
- 청와대에서 열린 세계 문구류 비교·전시 행사서 박정희 대통령과 만났을 때, 인상은?
"1979년 4월, 그러니까 박 대통령이 서거하기 6개월 전이었습니다. 청와대에서 세계 각국의 문구류를 전시하는 행사를 여니 오후 3시에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6개 문구업체 대표가 참석했는데 박 대통령 입에서 술 냄새가 확 풍겼습니다. 낮술을 한 거죠. 박 대통령은 내게 '모나미라는 상표를 우리 말로 크게 쓰고 영어는 작게 쓰는 게 좋겠다'고 당부하면서'다른 나라 볼펜은 시원하게 잘 써지는데 모나미볼펜은 좀 빡빡한 느낌이 든다. 우리 기술력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고 물어요. 그래서 우리는 한글 특성상 세필(細筆)을 선호하는 국민들의 필기 습관을 고려해 0.7mm를 쓴다. 일본은 0.8mm인데 우리가 더 고난도 기술이며 조금 쓰면 부드러워진다고 했더니 꽤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기억이 납니다."
- 초창기 해외 수출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처음에는 미국에 주문자 상표부착(OEM) 방식으로 순탄하게 잘 수출을 했습니다. 그런데 80년대 중반 곤욕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펜텍(Pen-Tech)'이라는 브랜드로 문구류를 수입·판매하는 바이어가 모나미153 볼펜 500만 달러 어치를 주문했는데 독점판매권을 달라고 해서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함정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한국에 '펜텍 코리아'라는 현지법인을 설립한 뒤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되는 값싼 문구제품들을 미국으로 수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앉아서만 당할 수 없어 수차례 미국을 오간 끝에 세계적 유통업체인 월마트와 문구류 50만 달러어치를 수출하기로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펜텍측이 손해를 입었다고 소송을 걸어왔지만 결국 우리가 이겼습니다."
- 한때 공장에 불이 나 위기를 맞았던 적도 있었다면서요?
"1978년 가을이었습니다. 집에서 자고 있는데 새벽 3시쯤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공장에 불이 났다는 겁니다. 그 때는 통금이 있던 때라, 파출소에 들려 통행허가를 받은 뒤 달려가 봤더니 공장이 폐허가 되었고, 특히 볼펜 팁을 생산하는 SPM실이 새카맣게 타버렸습니다. SPM실은 회사의 심장부로, 기계 자체가 기름 덩어리입니다. 스위스에서 5대를 들여왔는데 이것이 없으면 회사는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다행히 일본 도쿄 지사에 스위스 기술자가 파견나와 있어 신속히 분해한 후 조립해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 기업 공개 압력을 받은 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1974년 6월인가에, 재무부 차관보가 보자고 해서 갔더니 모나미의 증시 상장을 추진한다는 겁니다. 업종별 대표기업들을 증시에 상장시켜 자본시장을 육성한다는 목표를 정해 놓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 웬만한 기업들은 무자료 거래를 하던 때입니다. 증시 상장으로 모든 거래가 낱낱이 공개되면 도매상들이 거래를 꺼릴 것이 뻔했습니다. 다행히 소비자들이 모나미 제품을 사랑해줘 매출은 줄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날벼락이 떨어졌습니다. 기업 공개 4개월 뒤 검찰에서 회사에 들이닥쳤습니다. 수입대행사를 통해 사인펜 끝에 장착하는 닙(Nib)을 일본에서 전량 수입하는데 그것이 도매상에 판매한 장부와 차이가 난 것입니다. 탈세 사실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고 주가는 휴지조각이 됐습니다. 또 국세청에서 7억5000만 원의 추징금을 부과했습니다. 백방으로 뛰고, 또 행정소송을 통해 승소하면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 1997년에 2세 경영체제로 넘기셨는데 퇴진을 결심하게 된 동기는?
"모나미는 1960년 광신화학으로 출발했을 때부터 퇴직금 누진제를 실시해 왔습니다. 이것은 사원들이 평생직장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근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그런데 회사 연륜이 30년이 넘어가면서 장기근속 직원의 숫자가 늘어 퇴직금 누진제가 회사 자금 사정을 압박하는 요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해결한 사람이 다름아닌 제 큰 아들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모나미에 말단사원으로 입사해 과장 차장을 거쳐 이사로 있었습니다. 1년 중 절반이상을 공장에서 숙식하며 노조원들을 상대로 설득한 것입니다. 퇴직금 누진제를 원만히 해결하는 것을 보고 경영자로서의 자질을 인정한 것입니다."
- 기업경영을 하면서 가졌던 경영철학은 무엇이었습니까?
"저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흔히 우리 기업하는 사람은 돈을 앞장세우지만 그건 아니에요. 사람이 모든 일의 중심입니다. 될 사람을 골라서 써야 합니다. 또 저는 어떤 일을 하든 그 분야에서 만큼은 1등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기업은 정글의 법칙이 작용하는 경쟁구도에서 1등을 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습니다."
- 건강 비결은?
"사람은 다리부터 튼튼해야 합니다. 가능한 많이 걸어야 합니다."
(송 회장은 젊은 시절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전주 북중 시절 야구와 기계체조 검도 수영 스케이팅 등을 했다. 골프는 36살 때인 1964년, 의사인 형님들의 권유로 시작했다. 처음 1년 동안 국내 최초로 세워진 충무로 골프연습장에서 거의 매일 500개의 공을 쳤다. 친구들과 처음 간 필드에서 참패한 뒤 1년 동안 레슨을 받고 핸디캡 8의 싱글이 됐다. 1년 전 부터 힘이 딸려 골프장을 나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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