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미와 칼라펜
[한나프레스 신춘문예 당선작] <우수상-수필> 제목: 모나미와 칼라펜
2006-01-17
작가: 손은희 (인도네시아)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오랜 세월 손에 쥐여 왔던 익숙해진 손의 감각 때문일까? 아니면 이미 손끝에 오랫동안 길들여진 펜 끝의 감촉 때문일까? 나는 딸아이의 책상 위에 각양각색의 특이한 펜들이 많지만 그 어떤 화려하고 앙증맞은 펜보다도 모나미 볼펜이 가장 편하고 좋다. 그런 까닭에 나는 종종 모나미 볼펜을 찾지만 딸아이는 촌스런 펜만 찾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자기의 펜 중에서 아주 멋지고 특이한 디자인의 펜으로 선을 그어 보이며 그것으로 얼마나 멋지게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쓸 수 있는지 자랑을 한다. 그러나 아무리 구구절절이 설득을 해도 결국 내가 손에 쥐는 것은 모나미 볼펜이다. 딸아이에게 나 또한 모나미 볼펜이 얼마나 잘 써지고 편한지 이야기해 보지만 이미 내 말은 딸아이의 관심밖에 있다.
그런데 나는 일상 속에서도 딸아이에게는 관심밖에 있는 마치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 같은 모나미시대의 사고를 고집하고 강요할 때가 있다. 10대인 딸과 40대인 나 사이에는 엄청난 시간적, 환경적 간극이 존재함에도 오직 모녀라는 허물없는 관계를 빌미로 딸아이에게는 관심조차 없는 모나미 볼펜 같은 이야기를 자주 하는 것이다.
편지로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던 우리의 세대는 흰 종이 위에 감정의 심연을 퍼 올려 싣곤 했다. 물론 전화로도 마음을 나누었지만 감정의 토씨 하나 빼지 않고 고스란히 장문에 싣기에는 하얀 백지의 여백이 제격이었다. 그러기에 우리 세대는 행간마다 풋풋한 설렘과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배여 있던 첫사랑 고백을 담은 편지를 주고받았을 때의 그 황홀한 감격 하나쯤은 기억의 보물창고에서 손쉽게 꺼낼 수가 있다.
그러나 핸드폰과 이메일과 MSN으로 친구 간에 마음을 주고받는 딸아이 세대는 대부분 감정을 잘게 토막 내 짧디 짧은 단문으로 감정의 표피만을 전하고도 부족해 하지 않는다. 아니 서로의 마음의 깊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지 않고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듯 생활하는 것 같다. 머리맡에 낡은 녹음기를 밤새도록 틀어놓고 열병 같은 사춘기의 감정홍역을 홀로 치러내던 우리 세대와는 달리 딸 세대는 CD플레이어나 MP3를 들고 이어폰을 꽂은 채 흘러나오는 음악에 자유스럽게 몸을 흔들며 사춘기를 당당히 치러낸다.
짧은 단발머리에 무릎 아래까지 넉넉히 닿는 교복을 입고 교문을 들어서면서도 검열에 걸릴까 봐 가슴을 졸이던 우리 세대와는 달리 자유스런 머리 모양에 딸아이가 다니는 이곳 인도네시아에 있는 외국인 학교에서는 파마까지도 가능하고 귀걸이도 자연스럽게 할 수가 있다. 중학생인 딸아이가 교복을 입고 파마기가 있는 머리에 귀걸이를 거는 모습이 나는 생경하다. 그 낯선 풍경을 보다가 "학생이 무슨 귀걸이니?" 하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면 "아휴, 엄만 조선시대에 살아?" 하고 오히려 나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본다. 나는 짐짓 태연하게 "그러니!"하며 맞장구를 치지만 학생은 오직 공부라는 도식이 머리에 각인된 내게 여전히 의아함이 잔설처럼 녹지 않는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초등학교 때는 방과 후면 널뛰기, 고무줄놀이, 구슬치기를 하며 시간가는 줄 모르게 놀았고 중, 고등학교 때는 학교에서 돌아와 작은 밥상을 펴고 앉아 누런 빛깔의 연습장 위에 단어를 외워 가며 스스로 공부하는 것이 수험생활의 전부였다. 깨알 같은 사전을 뒤적이며 단어를 찾아 읽고 썼던 우리 세대와는 달리 딸아이는 전자사전을 손가락으로 몇 번 누르면 몇 초 안에 단어의 뜻과 발음까지 정확하게 들을 수가 있다. 모르는 숙제물의 자료를 위해 늦은 밤까지 참고서를 뒤적이던 우리 세대와는 달리 인터넷으로 온갖 광범위한 자료를 단시간에 수집하여 프린터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숙제물을 뽑아낸다.
이처럼 헤아릴 수 없이 너무나 많은 것들이 우리 세대 때와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 이 세대에 놓여져 있고 우리 세대에게는 생소한 그 환경 속에서 딸아이는 생활해간다. 그 시간적, 환경적 차이는 서로의 가치관의 빛깔을 너무나 다르게 채색해가고 때로는 마음의 뚝방을 높게 쌓게도 한다. 그런데 그 가치관의 엄청난 간극은 잊어버리고 딸아이가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나와 남편은 단지 자식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우리 시대의 골동품 같은 사고의 틀 안에 딸아이를 맞추어 가려 무던히도 애를 썼었다. 그러다 그 틀에 맞추어지지 않으면 남편은 예의 바른 아이로 키워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으로 매를 들곤 했다. 그렇게 딸아이의 사춘기는 우리 집안에 작은 폭풍을 일으키는 주범이 되곤 했다. 물론 그 매는 딸아이에게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 짓는 행동라인을 형성하는데 유효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때때로 그 매 속에는 아이를 우리 뜻에 맞게 조형하려는 권위주의가 묻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애의 사고의 창을 응시하며 그 색깔들을 이해해 보려고도 않고 우리 세대와 빛깔이 다르다는 한 가지 생각만으로 그 사고의 빛깔을 무시하면서 윽박질렀던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폭풍 속에서 서로의 빛깔을 이해할 수 없어 의아해하며 서로 이해 받지 못함에 너무나 힘겨워했었다.
오늘은 모나미 볼펜을 찾다가 딸아이의 책상머리에 앉아 예쁘고 특이한 이 펜 저 펜으로 글씨도 쓰고 그림도 그려 보았다. 색깔도 형광색, 금색, 은색을 비롯하여 반짝이는 무늬를 내는 펜까지 신기한 것이 많다. 빛깔만 다양한 것이 아니라 선의 굵기, 펜 뚜껑의 모양, 길이, 모양새 등이 천차만별이다. 차별화된 칼라와 디자인으로 승부하겠다는 각 회사들의 각오들이 펜마다 들어 있다. 이 펜 저 펜을 써 보니 그 색깔과 디자인이 예뻐서 마치 딸아이가 이 많은 펜으로 그리고 색칠을 하며 즐거워하는 것처럼 나도 슬며시 신이 났다. 별 그림을 그려 놓고 그 위에 반짝이 펜으로 색칠을 하니 진짜 별이 반짝이는 것처럼 실감도 나고 어떤 펜은 그을 때마다 색깔이 변하는 것도 있어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한참 동안 써 보고 그려 보다가 모나미 볼펜이 얼마나 편한지 설명을 해도 관심 밖인 딸아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흑백시대인 우리와는 달리 딸아이의 세대감각에 맞는 펜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아이에게 모나미 볼펜을 쓰라고 설득을 하다니! 나는 오늘 딸이이 펜으로 그림을 그리며 생각해 본다. 일상 속에서도 모나미 볼펜 같은 사고를 강요하고 윽박지르는, 시대에 뒤떨어진 엄마가 되기보다 칼라펜으로 함께 그림을 그리며 재미있어 하듯, 딸아이가 환호하는 것을 함께 보고 들을 줄 아는 시대에 걸맞은 개방적인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그래서 이미 딸아이에게는 맞지 않는 구시대의 행동방식과 가치관만을 고집하지 말고 딸아이 세대에 발맞추어 가면서 정말 버려서는 안 될 우리 시대의 소중한 가치와 인생의 교훈들을 그 애의 감각에 잘 맞게 접목시켜 가미해 가는 현명한 엄마가 되어야겠다는 것을…. 내가 딸아이의 사고의 창을 들여다보며 따뜻한 이해의 눈으로 그를 수용하려 할 때 그리고 그 애도 엄마 아빠의 사고의 기저에 흐르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소중한 인생의 자산을 자신의 감각에 맞게 흡수하려 노력할 때 두 세대 간의 간극에는 더 따사로운 융화의 강물이 흐를 것이다. 그러기 위해 10대와 40대인 우리는 서로의 눈높이가 되려고 한쪽은 까치발을, 한쪽은 무릎을 굽히는 사랑을 키워 가야만 하는 것이다.
세월은 흘러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는 올 것이다.
낙엽만 봐도 눈물을 흘렸던 내 터져 버릴 듯 부푼 앵두빛 사춘기가 꿈처럼 아득히 사라져 버렸던 것처럼 딸아이의 세대도 흘러 그 애도 나처럼 엄마가 되면 자기가 고수했던 가치관의 틀을 버리고 그 애의 자식 세대에 발맞추려 준비를 해야만 할 것이다.
그때 그 애는 또 지금은 절대적으로 애호하는 칼라펜이 촌스러워졌음을 느끼며 내가 모나니 볼펜을 들고 생각에 잠기듯, 칼라펜 시대를 회상하며 아련한 눈으로 삶을 반추하리라. 그리고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는 온다는 이 변할 수 없는 진리를 고개 끄덕여 수긍하면서 앵두빛 사춘기를 그리워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