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자랑스런 전북인상'
'자랑스런 전북인상' 송삼석 (주)모나미 회장
우리나라 최초 '모나미 볼펜' 생산 보급…적극적인 판촉·광고활동 '승승장구'
작성 : 2009-12-21 오후 8:43:18 / 수정 : 2009-12-21 오후 8:56:33
강인석(kangis@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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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오후 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자택에서 만난 송삼석 ㈜모나미 회장(82)은 팔순을 넘겼음에도 건강한 모습이었다. 비결을 묻자 "1년 365일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근처 산을 오른 덕분 같다"며 웃었다. 송 회장은 30년 넘게 등산을 즐기고 있으며 요즘도 매일 아침 부인 최명숙씨(75)와 함께 이화여대 뒷산인 '안산'을 오른다. 송 회장의 건강 비결에는 얼굴에 항상 미소를 담고 사는 긍정적인 삶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송 회장은 아호도 '항상 웃는다'는 항소(恒笑)다.
송 회장은 불모지였던 우리나라 문구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일으켜 세우는 등 평생을 기업과 국가경제 발전에 헌신하고, 지난 1995년 제4대 재경 전북도민회장을 맡아 고향 사랑의 일념으로 전북 발전은 물론 전북인의 긍지를 크게 높인 공을 인정받아 재경 전북도민회가 수여하는 2009년 '제6회 자랑스런 전북인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재경 도민회장직을 맡아 출향인사들의 단합과 고향 발전을 진두지휘했으면서도 송 회장은 "고향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많은데… 전북을 위해 한 일이 별로 없는 내가 이런 큰 상을 받게됐다"고 되뇌었다.
군산시 부암동에서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송 회장은 5살 무렵 완주 삼례로 이사와 삼례소학교(지금의 삼례초등학교)와 전주북중(23회)을 거쳐 서울대 상대를 졸업했다. 당시는 고등학교가 따로 없었고 5년제 중학교를 마치면 대학에 갈 수 있었다.
1952년 대학 졸업과 함께 첫 직장인 무역회사(삼흥사)에 취업했지만 회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2년6개월만에 양복지 원료인 원사를 수입해 의류업체에 공급하는 풍화산업의 무역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두 번째 직장인 풍화산업도 불황을 견디지 못해 쓰러졌고, 송 회장은 1955년 상공부 공무원 출신인 이용섭 광신산업 사장으로 부터 '지분의 10%를 주겠다'는 스카우트 제의를 수락했다.
일본에서 문구류를 수입해 판매하는 무역회사로 출발한 광신산업은 이후 광신화학으로 사명을 바꿔 물감과 크레파스를 생산했다. 1962년 한 박람회장에서 일본인으로 부터 '볼펜'을 처음 접한 송 회장은 일본 볼펜 제조회사로 부터 기술 전수를 이끌어냈고 1963년 5월1일 마침내 직접 제작한 볼펜을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볼펜인 '모나미 153볼펜'이다. '모나미'는 불어로 '나의 벗''나의 친구'라는 의미다.
적극적인 판촉활동과 광고마케팅으로 모나미 볼펜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광신화학도 승승장구했다. 광신화학은 모나미화학공업으로 이름을 바꾼 뒤 1974년 3월 다시 ㈜모나미로 사명을 변경했다.
생산시설을 확충했고 생산품목도 볼펜·크레파스·그림물감·사인펜·플러스펜·매직펜·샤프연필·연필깍기 등 수 십가지로 다양해졌다.
그러나 잘 나가던 모나미는 1974년 10월 무자료 거래, 즉 탈세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았고 국세청으로 부터 7억5000만원의 추징금을 부과받았다.
이 여파로 이용섭 사장이 경영에서 스스로 물러나면서 송 회장은 1975년 2월 모나미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57년 모나미의 전신인 광신산업에 입사한 이후 18년만이었다.
은행 대출을 통한 세금 분할 납부와 행정소송 승소로 위기를 극복한 모나미는 다시 일어섰고, 국내외에 생산기반을 확장해가며 사세를 더욱 키워나갔다.
70세가 되던 1997년 1월 시무식 날. 송 회장은 전 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장남(송하경)에게 경영을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송 회장은 "그 이후 지금까지 회사 경영에 단 한 마디도 간섭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만큼 아들의 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모나미는 지금은 기존 문구제조업체 이미지를 탈피해 '글로벌 사무용품 유통서비스 기업'으로 도약하고 있다. 소매점 및 도매점, 대형 할인점, 24시간 편의점 등 다양한 유통채널을 기반으로 전국 1일 배송 물류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무용품 유통서비스 기업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송 회장은 지금도 최소한 매년 한 차례 이상은 전주를 방문한다. 전주북중 동창 모임은 빼놓지 않기 때문이다. 송 회장은 "150명이 졸업했는데 이 가운데 39명만 생존해있다"고 말했다. 10여명의 전주지역 동창 얼굴을 1년에 단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전주를 찾는단다.
그는 "20여년 전 당시 전주공업단지에 공장을 짓기 위해 1만평 정도의 부지를 확보했지만 (지역내) 협조가 잘 이뤄지지 않아 공장을 짓지 못했다"고 아쉬운 기억을 떠올렸다.
송 회장은 재경 전북도민회원들에게는 "도민회가 내게 무엇을 해줬는지 생각하기 이전에 내가 도민회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반문하며 도민회 발전에 이바지해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 송삼석 회장은
군산에서 태어났지만 어린시절 완주 삼례에서 자라 지금도 전주를 방문할 때면 꼭 삼례에 들른다. 일제시대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부친의 영향으로 연세대 의대에 진학할 뻔 하기도 했다. 부친은 "일본인도 고개 숙이는 의사가 되라"며 미션 스쿨(당시 세브란스 의전) 진학을 원했지만, 송 회장은 부친을 설득해 끝내 서울대 상대에 진학했다.
성실과 열정, 끈기와 집념으로 말단 회사원에서 우리나라 문구업계를 대표하는 ㈜모나미의 1인자 자리에 까지 올랐다. 중학교때 야구선수를 꿈꿨고, 기계체조와 검도, 수영과 스케이팅, 골프 등 안 해본 운동이 없을 정도로 만능 스포츠맨이기도 했다.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역경의 열매''저 높은 곳을 향하여''나의 이력서'등의 저서가 있다.
전북일보 종합 P5(2009년 12월 22일 화요일)